2025년 2월 극단 달팽이주파수의 연극<저수지의 인어>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을 맞이했다. 철수는 하루 종일 저수지를 지키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가장 노릇을 한다.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는 철수이지만, 그가 유일하게 열정을 갖고 몰두하는 일은 ‘글쓰기’다.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 ‘영희’와 습작을 주고받으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문득 영희의 도움으로 멸종 위기인 ‘인어 부자(父子)’를 주인공으로 글을 쓰게 된다. 철수는 자신이 만든 ‘인어 부자(父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세 개의 저수지: 아르바이트, 아버지, 글쓰기
<저수지의 인어>에서 물은 중요한 소재이다. 철수가 일하는 저수지에도, 철수가 그려낸 인어 부자의 이야기에도 물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푸르른 조명과 안개가 깔린 무대, 몽환적인 핸드팬의 악기 소리로 철수는 지상의 집에 있을 때조차 물속에 있는 것처럼 연출된다. 그러나 <저수지의 인어>에서 물은 자연의 소재가 아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글의 세계에서도 구체화되는 물의 형상은 저수지를 통해서이다. 저수지는 대지 위에 물이 있는 형태이나 자연일 수 없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물을 가두어 놓은 인공 시설이다. 이를 통해 <저수지의 인어>가 배경으로 하는 세 가지 시공간-아르바이트, 아버지, 글쓰기-을 나는 세 개의 저수지로 해석하고자 한다.
① 저수지 하나, 아르바이트
저수지는 철수의 물리적인 직장이다. 정확히는 임시, 단기간의 일자리를 지칭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다. 저수지는 인근의 거주민들에게 유원지와 같은 기능을 하며 낮에는 저수지의 연꽃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찬다. 저수지의 건너편에는 꽤 높은 전망대도 있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보면 저수지가 어떻게 보일까’라고 전망대를 보며 철수는 말한다. 저수지에서 철수가 하는 일은 놀러 온 인파를 안내하며 그냥 가만히 있는 것, 고여 있는 것이다.
해가 떨어져 저수지에 사람이 줄어들면 철수도 퇴근을 하고, 두 번째 아르바이트인 배달을 위해 출근한다. 철수는 빡빡한 하루에 어떠한 감정 동요도 없으나, 자신에게 허용된 짤막한 시간에는 오직 글쓰기에만 매달릴 뿐이다. 하고 싶은 건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 하루, 24시간, 1,440분의 시간. 대부분의 시간을 철수는 일하고 아버지를 부양하는 데 사용한다. 철수가 하는 일은 흔히 말하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 높은 ‘나쁜 일자리’다. 지금의 일이 경력이 되어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할 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철수도 모르는 채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뼈와 살을 저수지에 넣을 뿐이다. 철수는 저수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르바이트는 철수에게는 삶이 고여가는 저수지이다.
② 저수지 둘, 아버지
철수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살이 찐 아버지가 무대에 등장한다. 힘든 호흡을 내쉬며 한 손에는 라면을 다른 손에는 뻥튀기를 들고 등장한 아버지는 연극 내내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음식 먹기 이외의 활동은 하지 않는다. 철수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가족이 화염 속에 불타 죽은 이야기, 친구네 닭과 개가 싸워 둘 다 죽은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는 반복적으로 삶의 의미 없음을 말한다. 철수는 아버지에게 라면을 먹지 말라고, 햇빛을 쐬라고, 영양제를 챙겨 먹으라고 다그친다. 아버지는 말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버지에게 분명한 것은 죽음이라는 보편의 결말이고, 그렇기에 살아있음도 죽음을 위한 과정으로만 여길 뿐이다. 죽음을 위한 과정이 된 삶은 늘 축축하고 적막하다.
집은 아버지의 저수지이다. 아버지는 시작을 알 수 없이 깊이 침잠해 있고 현재의 상태를 더 낫게 하는 어떠한 노력도 부정할 뿐이다. 감정의 동요가 없는 철수는, 이러한 아버지를 배신하지도, 저항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 지점에서 바다가 아닌 저수지에 사는 인어 부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③ 저수지 셋, 글쓰기
해야 하는 일로 가득 찬 철수의 삶에서 글쓰기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저 하는 유일한 일이다. 그리고 글쓰기로 매개로 철수는 온라인 공간에서 영희를 만났다. 서로 피곤해지지 않도록 각자의 신상 정보는 비밀로 하기로 한다.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쓴다. 철수는 쓰는 것은 픽션이지만 철수의 삶이 고이는 곳이다. 철수라는 저수지에서 알바하며 아버지를 부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이 고이는 곳이다. 이 공간에서 철수는 영희의 도움으로 인어 부자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인어답게 살고 싶다.
인간은 인간이다. 인어는 인어이다. 인간이 인간이 되고, 인어가 인어가 되는 데에 논리적으로 그 존재 이상의 전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답게’ 혹은 ‘~답게’ 살고 싶다는 문장을 일상의 외각에서 우발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것은 그 문장의 주어가 되는 인간이 인간임에도 인간으로 살지 못한다는 고발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고발은 무언가 그 존재대로 살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다시 전제시킨다. 우리는’인간 실격‘ 선언을 통해 인간의 정의에 대하여 다시금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철수가 만든 인어 부자의 이야기에서는 ‘인어답게 살고 싶다’는 아들 인어의 표효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철수가 만든 세계관에서 바다는 다 같은 바다가 아니다. 물에서 사는 인어도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 지나치게 빠른 급류, 인간 활동으로 지나치게 오염된 해류의 경우 잘못 휘말리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대응할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찬 바다 세계에 대한 아버지의 대안은 인어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철수의 이야기에서 인어가 다리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목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물에 닿지 않는 것이다. 바다의 삶을 포기하면 인간 속에 섞여 살 수 있다. 즉, 인어를 인어답게 만드는 것-바다에서 살기-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인어라는 사실은 인간들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어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 되기에 성공한다거나 인어가 되지 않기를 성취함과는 다르다. 인어 부자는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그들이 인어라는 사실을 영영 기억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맞거나 우산을 써서 피하는 비가 내리면 인어 부자는 꼬리가 튀어나올까 전전긍긍하며 저수지 아래로 숨는다. 인간으로 보이지만 인간 세계의 규칙에 문외한인 이들은, 바다가 아닌 횟집의 날 물고기를 훔쳐 끼니를 해결하고 변변한 주거지나 직장 없이 저수지에서 숨어지낸다. 인어로도 인간으로도 살지 못한다. 그런 삶이 정당화되는 이유는 생존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세계, 공포화된 바다라는 장소에 있다.
생존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어다운’ 혹은 ‘인간다운’ 삶의 형태는 뒷전이 된다. 아들 인어는 생존이 아닌 삶을 살고 싶다 말한다. 그 구체적인 방식은 바다로의 회귀이다. 그것은 단순한 복구 혹은 복고라기 보다 자신의 정체를 정의하고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지향이다. 생존이 모든 것이 되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아들 인어는 그린란드의 오염되지 않은 바다에 대해 말한다. 그린란드의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인어에 대해 아들은 희망으로 사건을 설명하고, 아버지는 인어들의 사망으로 사건을 이해한다.
철수는 글을 쓰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들 인어임을 밝힌다. 아들 인어의 근거는 아버지 인어의 근거처럼 단단하거나 명확하지 않다. 근시안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들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인어답게 살고 싶다는 어떤 외침, 인어다움에 대해 질문하는 어떤 의지. 바다로 간 아들 인어에게 닥칠 미래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왜 아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 연극은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질문을 만든 사람, 극 중 철수에게로 돌아간다.
영희는 죽었고, 철수는 살았으며, 인어는 바다로 간다
성질은 운명이 된다는 대사는 철수를 통해, 아버지를 통해, 인어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된다. 어쩌면 그럴지도.
연극에서는 주요하게 등장하나 앞선 문단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영희다. 영희의 존재는 연극 안에 있지만 내내 겉돈다. 그것이 연극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녀를 언급하기 애매해지는 까닭이다. 철수가 영희를 만난 유일한 공간이 온라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연극에서 영희는 분명히 여자 사람으로 재현이 된다. 의도 없는 연출일 수도 있으나 ‘영희’는 분명 실명이 아니며, 극 중 ‘영희’를 맡은 배우는 연극에서 철수의 상상 및 대화 속에서 재현되는 모든 여성 인물을 연기한다. 아르바이트를 다녀와 힘이 빠진 여자, 헌팅포차에서 만난 어떤 여자는 모두 영희다. 관객은 연극을 해석하고자 할 때 결정해야한다. 영희를 개념으로 인식할 것이지, 구체적인 인물로 인식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영희는 사람으로 무대에 서있다.
연극의 주인공은 철수다. 주인공 철수의 생활을 따라가며 나는 숨이 답답했다. 모든 것이 말이 된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 불화하는 소통, 과중한 노동. 그렇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은 철수가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루 최소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집안일을 챙기고 아버지에게 예의 바르고 다정하다. 그리고 짬을 내어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간다. 모두가 일을 하며 산다. 모두가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견디고 돌보며 살아간다. 꽤 다수는 돈을 주지 않는 무언가에도 시간과 정신을 몰두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순순히 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영희는 철수를 습작 모임에서 만났다. 철수의 글을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라 칭찬하고, 인어 부자의 이야기를 써볼 것을 권유하지만 정작 영희는 한 글자의 글도 쓰지 못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글을 쓸 힘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죽는(그것으로 추정 된)다. 철수가 직감적으로 영희가 남긴 글을 죽음으로 해석하던 날 철수가 일하던 저수지에는 젊은 여자가 전망대에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희였을까. 철수는 영희의 얼굴을 모르기에 알 수 없다.
저수지에서 자살이 일어난 직후 철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친구에게 알아본 수박농장에 가서 일하기로 한다. 더 오래 일하고 조금 더 벌 수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어쩌면 글쓰기를 병행할 수는 없는-로 향한다. 아버지는 아주 조금 변화했다. 철수는 인어 부자 이야기를 끝까지 썼다. 영희는 연극에서 무엇이었을까. 일하고 글 쓰는 젊은이 둘, 영희와 철수 중 영희는 죽었고 철수는 살았으며 이야기 속 아들 인어는 바다로 향했다. 미적지근한 결말 속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어 아들이었고, 연극의 주인공은 철수였으나, 우리 삶에는 세 명 모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 성질은 운명이 된다. 이것이 부정과 긍정의 의미가 없기를 바라며.
* 아트인사이트에 기재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74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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