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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유령 (고선웅, 2025 세종문화회관) - 삶이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연극&뮤지컬

by 세모나는 2025. 6. 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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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 없던 무대 위에 배우가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생에서 배 씨, 정 씨, 그리고 다시 배 씹니다. 무대에 섰으면 연극에서 맡은 역할을 말해야지 생은 무슨 생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배 씨가 다시 배 씨는 뭐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 근데 그렇게 말고는 달리 말을 못 하겠습니다.” 배우의 자기 고백으로 시작하는 연극 <유령>은 이를 통해 자신이 연극적 약속을 온전히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무대에 서는 순간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배우가 아닌 인물이다. 그러나 <유령>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방식의 몰입을 막아선다. 관객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배우임을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첫 대사 이후 ‘연극답게’ 배명순의 서사가 전개된다. 배명순은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이다. 마침내 눈에 밟히는 아이들을 두고 가출을 선택하고 그녀의 주민등록은 말소되어 정순임이란 이름으로 살게 된다. 주민등록이 없으니 성실하게 일해도 그녀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만 주변에 가득하다. 16년 후 원래의 이름을 찾게 되나 그것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였다. 그녀는 죽는다. 마침내 그녀의 죽음이 유발한 이 연극의 유일한 암전을 지나, 시신 안치실에서 화장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또 다른 무연고자 유령들을 만난다. 이야기를 건너며 이지하 배우가 읊조린 첫 대사는 분명한 사실이 된다.



연극의 초반, 배명순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은 오래된 영화의 OST를 배경으로 우스꽝스럽게 전개된다. 코미디 같기도, 슬랩스틱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연출에도 배명순이 실존 인물이고 오랫동안 남편에게 맞아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인물이 당하는 모든 폭력이 진짜임을 보여주기 위해 분장사가 등장한다. 분장사는 두들겨 맞은 배명순의 얼굴은 새빨간 멍으로, 술을 마셔 하얗게 질린 남편(오 사장)의 얼굴은 하얀 분으로 칠한다. 분장사는 괴로워한다. 분장사는 선배 배우 이지하와 인물 배명순에게 동시에 이입하듯,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해명한다. 그렇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 연극이 정해진 대사를 따라가는 것보다 삶을 사는 것이 더 즉흥적이고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가 없다.



연출은 어디 가고, 배우들만 남아



인간은 자신의 삶만을 살아내므로, 어쩔 수 없이 종종 혹은 자주 자기 자신에게만 깊게 이입하곤 한다. 현실에서 침잠하는 이들을 연극 <유령>에서는 상승하는 소동을 통해 보여준다. 연극에서는 크게 두 번의 소동이 일어나는데, 소동의 내용은 배우가 연출과 대본의 지시를 동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소동은 정순임을 괴롭히는 식당 사장 박 사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잠시 전만 해도 박 사장이었던 배우는 자신에 대한 야유의 말을 들은 뒤 돌연 배우 강신구가 되어 말을 한다. “유경아, 정말, 미치겠네, 나도. 그 대사 빼고 가자고 연출한테 몇 번을 말했다니까. 우리집 애들이 이 연극 보러오겠어? 몇 번을 애원했다니까. 근데 안 빼주잖아. 오 씨 역할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연출! 어딨어 연출! 나도 이런 대사 안 좋아해, 연출!”갑자기 배우 강신구가 튀어나오며 배명순의 서글픈 서사는 초점을 잃어버리고 연극은 소동극 내지는 희극으로 장르를 바꾼다.

첫 소동을 계기로 터진 배우들의 불만으로 인해 연극은 내내 삐걱거리며 진행된다. 두 번째 소동은 결말을 둘러싼 배우들의 푸념이었다. 이미 갈 데까지 가버린 연극을 마무리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배우들은 걱정한다. 무대감독은 연출에게 전화를 받고, 그대로 상황을 정리할 것을 배우들에게 요구한다. 살아서 유령처럼 취급당한 이들이 죽어서도 유령으로 떠도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어떻게든 그들이 떠돌지 않게, 승천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이거 너무 이상하잖아?” “연출을 믿은 내가 바보다!” 배우들은 소리 지르지만 그들은 배우이므로, 이 상황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 연출의 말을 따르는 것임도 이해한다.

배우들이 애타게 찾는 연출은 연극의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연출의 대행으로 무대감독 역의 배우가 등장하고, 관객석에서 김신기 배우가 등장한다. 신이 만든 세상을 사는 것은 인간인 것처럼. 연출이 쓴 대사와 무대를 뛰어다니는 것은 배우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만날 수 없고, 배우는 무대 위에서 연출을 만날 수 없다. 주어진 삶을 사는 것, 주어진 배역을 해내는 것만이 전부다. 그것은 온전한 비참함 혹은 의미 없음은 아닐 것이다.

I’m nowhere, 그러나 I’m now here.


연극은 관객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연극은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다. 어떤 절망스럽거나 우악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모두를 죽여서라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방도 존재한다. 연극에는 주인공도 필요하지만 악역도 필요하고, 지나가는 시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사의 두께가 인물의 경중을 나타낼 리 없다. 이 연극의 커튼콜을 보기 위해서는 각자가 각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삶의 부담스러움은 어떻게든 살아가기를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나의 선택만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무대를 생각한다. 하고 싶은 대사가 아니라 요구되는 대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삶의 끝을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연극의 마지막을 생각하기는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극은 인생, 인생은 연극이라는 은유는 과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연극은 연극이고 삶은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에게 있어 그 은유의 문장은 실재임을 이해한다. 연극 <유령>은 무연고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연극 혹은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글로 전하기엔 뒤죽박죽이지만 객석에 앉아 장면을 보면, 이 모든 사건이 물 흐르듯 지나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무연고자들에 대한 굿 내지는 제례 의식으로 읽힌다.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을 인간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하는 것이 이 연극이 나아간 방향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배역이라는 키워드, 그럼에도 그것을 맡아야 한다는 운명으로 무연고자와 인간 배우를 동시에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타당했고, 불쌍하지만은 않게 표현된 무연고자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나는 괜히 마음에 들었다.

연극 <유령>의 영어명은 <I’m nowhere>이다. 눈을 비비고 보게 되는 제목이었다. 해석하자면 ‘나는 어디에도 없다’로 유령이 된 무연고자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나 띄어쓰기를 슬쩍 해 ‘I’m now here’로 읽어보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가 되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없는 자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연극 <유령>이 하고자 한 일이다.

*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5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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