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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극] 단심 (2025, 국립정동극장) - 겪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연극&뮤지컬

by 세모나는 2025. 5. 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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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의 2025년도 K-컬쳐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무용극 <단심>이 5월 8일(목)부터 6월 28일(토) 공연한다. 국립정동극장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창작 초연으로 선보이는 신작 <단심>은 고전 설화 ‘심청’을 모티브로 심청의 내면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심청의 마음을 마주하기


심청이의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심청:‘고전 소설 심청전(沈淸傳)의 주인공. 젖먹이 때 어머니를 잃고 봉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장성한 뒤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供養米) 3백 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印塘水)에 빠졌으나 죽지 않고 다시 세상에 태어나 왕후가 되었으며, 부녀 상봉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반가움에 감격하여 멀었던 눈을 뜨게 되었다. 효녀의 본보기로 일컬어진다.’ (출처: 단국대 한국한자어사전)

누구나 안다는 것은 심청의 이야기이지, 심청이는 아닐 것이다. 심청이를 안다는 것은 그럼 어떻게 가능할까. 무용극 <단심>은 흰옷의 심청이 뒤로 검은 옷의 심청을 함께 등장시켜 심청이의 무의식과 내면을 상상해 본다. 둘은 모두 심청이다. 검은 옷의 심청은 흰옷의 심청과 같게 또 다르게 몸동작을 이어간다. 

심청전은 워낙 유명하고 오래된 판소리계 소설이다 보니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자 인당수에 몸에 던진다는 설정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오간다. 이를테면‘물에 빠지는 것이 효도가 맞는가’와 같은. 사람 목숨을 내어 공양미를 받는 것이 맞는지, 공양미에 아버지 눈이 떠질 수 있는 것은 맞는지, 눈이 뜬다고 하더라도 하나뿐인 딸을 팔아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될 아버지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있었는지. 당대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향한 효심이라는 개념으로 이 모든 균열을 봉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의심쩍은 요소가 많은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심청이를 호명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청이는 왜 장승상부인의 양녀 되기와 같은 실현 가능성 높은 대안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바닷속에 용왕이 없었더라면, 심청이를 올려보내어 왕후가 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파국을 맞는 것 아닌가. 심지어 심 봉사가 눈을 뜬 경위는 공양미가 아닌 왕후가 된 심청이를 만난 것이었다. 모두가 아는 이런 불안을 검은 옷의 심청은 몸으로 표현한다. 지고지순 아버지를 위하는 흰옷의 심청이와는 다르다. 검은 옷의 심청은 심 봉사의 지팡이를 빼앗기도 하고 흰옷의 심청이를 심 봉사로부터 떼어놓으려 하기도 한다. 같은 동작을 하기도, 짝을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나 모든 것이 흰옷의 심청보다 거칠다. 

심 봉사는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아 심청을 지극정성으로 기른다. 그리고 심청이는 걷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조선시대 10대 중반이면 이미 성년이라고는 하나 심청이의 나이로 추정되는 15세가 어린 것도 사실이다. 심청이는 앞날에 놓인 시간이 무섭지 않았을까.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 아버지를 모시고는 마땅히 시집가기도 어려울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쇠한 아버지를 두고 그런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죄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늠하며 그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와중에 누군가의 은덕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그것은 결국 자신이 치르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자라는 어떤 충동적인 선택이 절박함에서 나왔다고 나는 상상해 본다. 아버지가 눈만 뜬다면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다는 절박함. 혹은 미래를 그리기는 어렵고, 다 그만하고 싶다는 절박함. 아버지가 눈을 뜬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더라도 나는 인당수로 가니 나쁠 건 없지 않으냐는 절박함. 사람이 구석으로 몰리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한다. 그 절박한 마음을 검은 옷의 심청은 마음껏 몸으로 표출한다. 흰옷의 심청, 검은 옷의 심청, 심 봉사와 뺑덕어멈의 춤으로 이루어진 첫 막이 유달리 긴 것은 이 장면이 심청이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 아니었을까.

무용극을 통해 심청을 만나야 할 이유


판소리꾼의 해설과 고수의 북소리가 배경에 깔린 채, 무용수들의 움직임만으로 무용극 <단심>은 전개된다. <단심>은 오직 무용만으로, 혹은 오직 말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하는 자’와 ‘겪는 자’를 분리한 무대 연출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갈 것이다. 무대 공간을 넓혀 미디어 아트와 결합한 배경 연출 방식 또한 무용극과 어우러져 매력을 더했다. 

무용극 <단심>에서 겪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겪을 뿐이고, 살아낼 뿐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과 닮아있다. 심청의 이야기를 지금 한다는 것, 그 수단이 무용극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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